10년간 유럽 무대의 기립박수, 한국의 지휘자 이영칠.
세계 무대에서 500회에 달하는 연주회를 오직 스스로 넓혀간 그의 고독한 여정을 바라본다

 

 

 

현대 세계에서 문화예술은 더욱 중시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공연문화가 성행하고, 이를 찾는 관광객도 늘었다. 수많은 공연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졌고 그 덕분에 급격하게 변화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클래식은 불멸의 예술로 세계인을 굳건히 사로잡고 있다.
또한 이전부터 클래식은 국가의 예술성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대표적인 문화수준의 잣대가 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많은 국가에서 문화예술의 명품 브랜드를 건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서, 각국에 속한 오케스트라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서울시향의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토록 치열한 세계무대에서도 거침없이 종횡무진하는 한국인 음악가가 있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지휘자, 이영칠이다.

 

해외 무대에 선 몇 번의 경험으로, 전도유망하다고 평가되는 여러 예술가들과 달리, 이영칠은 벌써 500회가 넘는 연주를 유럽, 남미, 아시아를 오가며 총 50개 도시에서 행한 바 있다. 그런 이영칠은 어째서 한국에서 이토록 숨겨져 왔을까. 실력을 입증 받고 여러 무대를 바쁘게 오른 그의 경력은  국내의 어떤 음악가보다 화려하다. 그는 클래식의 본고장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의 국가, 독일 함부르크나 모스크바에서도 지휘봉을 잡은 바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크게 조명되지 못했다.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기에 실력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국내에서 이렇다 할 인지도를 획득하지 못한 그의 금메달은 그저 희미하게만 반짝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조명해야 할 이유는 뭘까. 클래식의 본고장인 서양은 우리의 생각보다 동양인의 클래식에 대해 적대감이 크다. 백인이 국악의 음악감독이나  지휘봉을 잡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 그들에게 클래식은 그들만의 고유의 문화라는 인식이 있다. 게다가 관객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교양인들의 고급문화이며 지식인들만의 유희라는 고지식한 통념이 지배적이다. 그런 동양인이 베토벤의 국가에서 베토벤을 연주하고, 차이코프스키의 국가에서 마찬가지로 자국 고유의 재산을 지휘한다는 것은 비판적 시선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함부르크, 모스크바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훌륭한 공연을 반증하며 그는 재차 초대되었고, 점점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고히 하고 있다. 일본 NHK 심포니의 88주년 무대에도 초청되는 영광을 안았다.


NHK심포니를 지휘한 것은 현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 정명훈 이후 두 번째다. 세계에서는 동양인으로서,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서 편견과 선입견을 실력으로 무너뜨리고 있는 한국의 위대한 음악가임을 입증하는 경력이다.

우리나라에서 예술가의 실력을 가늠하는 큰 잣대 중 하나가 대중의 인지도다. 그러나 실력 없이 얻은 인지도가 실력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으며, 반대로 인지도가 낮은 경우엔 과소평가된다. 체육계의 경우 세계 무대에 오른 국내 선수들의 연봉 및 실적으로 투명성이 유지되나, 예술계는 비교적 비좁은 시장 속에서 성취의 성패마저도 모호하게 평가된다. 뚜렷한 1등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성과는 빛을 보지 못한다. 그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채 혼자만의 싸움에 지친 예술가들은 결국 지치기 마련이다.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재목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 그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또 그들을 마음으로나마 후원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응원이자 한 편으로 국위선양의 일환일 것이다.

지휘자 이영칠 역시 이런 점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10년째 홀로 유럽에서 지휘자로 생활하고 있다. 한국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 시간을 되새기던 그는 자신의 생활이야말로 ‘홀로서기’ 였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영국, 멕시코, 폴란드, 체코, 헝가리, 핀란드, 터키,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 전 세계의 초청을 받아왔다. 어느새 500회가 넘는 연주를 지휘해 왔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가 이토록 고난한 길을 걸어오게 했지만, 때론 그만두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 많은 국가를 돌며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동안, 국내의 관심은 거의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계 5대 오케스트라인 모스크바에서 초청이 왔을 때도 국내 언론은 그에게 크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국가적인 행사인 신년음악회에 초대된다는 것은 지휘자로서 굉장한 경력이었다. 전석 만석에 기립박수, 그러나 그 자긍심조차 이영칠은 조용히 누려야했다. 세계적인 일본의 NHK 오케스트라의 88주년 무대에 오를 때 역시 이슈화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부터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남달랐다. 유학생이 드물었던 90년대, 인종차별적 시선과 무시를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인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음악이라 불려지는 클래식계에서 동양권 국가는 자연히 편견의 그늘에 가려졌다.  지휘자로서는 드물게 호른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공부하기까지 이영칠 지휘자는 수많은 편견에 도전하고 이겨냈다. 뉴욕에서 박사까지 받고서 돌아보니 그에겐 한국인 최초 타이틀이 여럿 있었다. 그 이후 지휘자로 전향하며 유럽 각국을 돌기까지 벌써 20년. 어느새 타지 생활만 20년이 됐다. 한국인 음악가로서 해외를 정복하던 고난의 과정.그 모든 성취가 국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가 이뤄낸 업적이었다.

여러 국가들이 행하는 음악가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볼 때, 한국은 음악학도들에게 척박한 환경이다. 유럽, 미국, 일본의 경우 음악인들에 대해서 아낌없이 국가와 기업의 투자가 있다. 언론의 관심도 높을 뿐 아니라 기업과 언론의 관심도 월등히 높다. 이는 음악이라는 예술, 곧 강한 문화의 힘을 통해 국가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문화 선진국으로서 자리하기 위한 노력이다. 단신으로 세계를 투어한 지 10년이 지난 이영칠이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은 어쩌면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예술에 대해 기울인 노력이 뒤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골프선수 박세리와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의 선례처럼, 인재 양성을 위한  나라의 부족한 지원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한국 음악계는 전환점을 이룰 때다. 부정적이라 한들 국민들이 국내 음악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만큼, 이 시기가 개혁을 이룰 수 있는 기회다.
시향에 대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시향의 안일한 태도를 지켜주는 것이 아닌, 발전을 위해 분명한 사용처와 적합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우선적으로 약속되는 것이  첫 시작일 것이다. 지휘자 이영칠 역시 한국 음악계에 많은 변화의 움직임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 생활을 통해 음악가로서의 역량만 성장하는 게 아니라,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 커진다고 말했다. 국가를 알리고 있다는 사명감, 문화가 국가 이미지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이야기하며 그는 한국이란 나라를 알리는 성취감이 없었다면 타지생활을 그만두고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을 것이라 얘기했다. 자그마치 20년동안이나 미국과 유럽을 떠돌며 생활했던 그의 힘들었을 여정속에서 국민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는 말에 이영칠 지휘자는 못내 솔직함을 토로했다. ‘제가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사실 너무나 서운하고, 음... 이건 정말 너무해요.’ 라고 토라진 듯 얘기하는 그가 진정한 예술가로서 국내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사진제공:스페셜원컴퍼니)

 

Posted by 무림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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